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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적 몽상가 스티브 잡스 비하인드 스토리


출처 :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4&artid=201110281759341&pt=nv

지난 10월 5일, 애플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중퇴했고,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방출됐으며 7년여 동안 암 투병으로 세상을 마감한 그의 인생은 실패와 성공, 그리고 쉼 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Childhood
“잡스는 엄청난 울보였어요. 경기에 지기라도 하면 분에 못 이겨 울부짖으며 가버리곤 했죠. 어느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아주 별난 친구였어요” (수영 클럽 친구 마크 워즈니악)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의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곧바로 입양됐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그의 친모는 자신이 직접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대신 부유하고 교육 수준도 높은 집안에 아이를 보내기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넉넉지 않은 형편에 대학 교육도 받지 않은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보내게 된다. 아이를 입양 보내며 그녀가 양부모로부터 약속받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잡스를 꼭 대학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에 폴과 잡스 부부는 잡스를 미국 내에서도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사립대 리드칼리지에 보내며 친모와의 약속을 지킨다.

비록 잡스가 6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말이다. 친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잡스는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어린 시절 잡스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과잉 활동아였는데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집 안을 뛰어다니고 호기심이 지나쳐 자주 응급실 신세를 질 정도였다.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을 좋아했고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하루 종일 TV 앞에 붙어 살기도 했다. 혼자 있길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은 하나같이 잡스를 회상하며 “늘 우는 소리를 하는 외톨이”라고 기억할 정도다. 못 말리는 말썽쟁이였지만 폴과 클라라 부부는 아들을 사랑했다. 어린 잡스가 매우 총명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직감했고 아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잡스가 훗날 숱한 방황과 말썽을 피우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양부모로부터 받았던 사랑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잡스는 성인이 된 후에 대화 치료사였던 친어머니와 정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언제나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기며 그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Apple
“애플로 회사 이름을 정한 잡스는 로고를 한 입 베어 문 사과 모양으로 하자고 주장했어요. 그 주장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죠. 이건 아마 잡스의 사과에 대한 병적인 집착 때문인 것 같아요”(애플 설립 당시 회사 동료들)

IT 종사자들에겐 천혜의 환경이었던 샌프란시스코 마운틴뷰 인근에서 나고 자라며 전자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온 잡스는 중학교 시절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친구이자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다. 그보다 다섯 살 많은 워즈니악은 전자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전형적인 천재였다. 두 사람은 남의 집 허름한 창고에서 자신들만의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설계에 관한 한 천재성을 지니고 있던 워즈니악과 제대로 돈 버는 방법을 아는 수완 좋은 청년 잡스는 곧 사업을 구상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공통된 기질이 있었다.

1976년, 두 사람은 컴퓨터 회로기판을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 창업하고 이름을 ‘애플(Apple)’이라 짓는다. 당시 선불교에 심취해 있었던 잡스가 자신이 수행을 하던 사과농장을 연상해 지은 ‘애플’이란 회사명에 워즈니악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명을 애플로 할 경우 비틀스의 음반 회사인 애플레코드와 법적인 다툼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의 이러한 걱정은 나중에 현실이 된다. 애플이 주식시장에 상장되기 직전인 1981년, 애플은 애플레코드와 음악 관련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애플이 컴퓨터만 만들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 아이팟을 내놓으면서 애플레코드가 소송을 걸고 이 소송은 2010년 두 회사가 화해에 이를 때까지 이어진다. 애플의 상징인 ‘Bite Apple(베어 문 사과)’의 유래에 대해선 열 가지도 넘는 설이 있다. 잡스가 한 번도 밝힌 적이 없기 때문에 갖가지 추측만 난무한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잡스는 사과가 완벽한 과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회사 역시 그렇게 되길 바랐다는 설이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했던 잡스가 회사 이름을 애플로 짓고 컴퓨터 이름까지 매킨토시(Macintosh: 사과 품종의 하나인 Mclntosh를 변형시켜 지은 이름)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세한 업체로 불리한 사업 여건 속에서도 잡스는 자신이 믿는 비전을 열정적으로 설득해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만든 퍼스널 컴퓨터가 시장에서 성공을 하게 되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시장에 공개되며 스티브 잡스는 억만장자가 되는 동시에 미국 최고 부자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Family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어가던 1970년대 말, 잡스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온 여자친구 크리스 앤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그는 여자친구 배 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아버지 없는 아이로 태어나 입양돼 자라며 오랫동안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온 그가 자신의 아이를 같은 처지로 만든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맨 처음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여자친구를 찾아가 아이 이름을 리사(Lisa)라 짓고 얼마간 양육비도 보내주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법정 싸움을 벌였고 친자 확인 검사까지 거쳐 리사가 친자임이 증명된 후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잡스와 크리스 앤, 그리고 리사가 화해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훗날 그는 딸의 이름을 딴 ‘리사’라는 컴퓨터를 출시하기도 하는데 비록 잡스 생애 최고의 실패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모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딸에게 전하는 화해의 메시지라 해석된다(아버지의 머리를 쏙 빼닮은 리사는 하버드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스티브 잡스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애플의 제품들. 잡스는 죽기 전 애플의 향후 4개년 계획을 수립해 경영진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 잡스는 떠오르는 IT의 황태자답게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했다. 자신과 비즈니스 관계에 있던 레지스 매키너 사무실의 여직원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고 가수 조엔 바에즈, 그래픽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레제와도 연인 관계였다. 그는 주로 스탠퍼드대 출신의 금발 미인들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잡스와 결혼해 20년 가까이 그의 곁을 지킨 아내 로렌 파월 역시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1989년 잡스는 스탠퍼드대에서 강의를 하던 중 로렌을 만났고 두 사람은 2년 뒤인 1991년 잡스의 선불교 스승인 승려 코빈 치노의 주례로 간소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당시 로렌의 배 속에는 두 사람의 첫아들인 리드가 자라고 있었고 결혼 후 두 딸이 태어나며 잡스는 리사를 포함한 네 자녀의 아버지가 된다. 잡스는 로렌을 처음 만났을 당시를 ‘저항하기 어려운 감정에 이끌렸다’라고 회상했다. 잡스보다 아홉 살 연하로 펜실베이니아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로렌은 펀드매니저 생활을 하다 다시 스탠퍼드대에 입학해 잡스를 만났다. 남편만큼이나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그녀는 교육과 여성권리운동 등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온 사실이 알려지며 세상을 바꾸려 한 혁신가의 ‘진정한 동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신의 첫아이를 부인했던 잡스는 가정을 꾸리며 점차 가정적인 면모를 가지게 된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그는 아들과 집 주변을 산책하며 대화를 즐기고 학부모 참관 수업에도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2004년 췌장암 선고를 받은 뒤 죽기 전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냈고 마지막 몇 주일 동안은 애플과 네 자녀, 아내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족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힘들어했고 이와 같은 사실을 가족에게 상냥하게 사과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일생 동안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은 자서전 집필을 거절해온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친구였던 전기작가 아이잭슨에게 집필을 허락했는데 이는 자녀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Money
“저는 스물셋에 백만장자가 됐습니다. 스물넷에는 억만장자가 됐고요. 하지만 스물다섯부터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스티브 잡스)

1980년 12월 둘째 주 금요일. 시장에 처음 공개된 애플의 주식 460만 주는 1시간에 모두 팔리며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다. 투자자들이 몰리며 주가는 곧 30배 가까이 폭등했고 750만 주의 주식을 갖고 있던 잡스는 스물넷의 나이에 2억1천7백만 달러를 소유한 거부가 됐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젊은 억만장자였다. 이른 성공 이후 그의 비즈니스가 언제나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즐겨 입던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픽사의 캐릭터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떠나 있던 시절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의 CEO로 재직하며 ‘토이 스토리’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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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든 애플사에서 쫓겨나고 새로 차린 신생 회사가 실패하는 등 벼랑 끝에 몰린 적도 있지만 잡스는 위기를 극복했고 그의 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난 9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잡스의 재산은 7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8조3천억원가량이다. 대부분 부동산이나 현금이 아닌 주식 평가액에 따른 것으로 잡스는 애플사를 나와 있는 동안 만들었던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를 디즈니에 팔며 얻은 주식 1억3천8백만 주와 1997년 애플로 복귀한 뒤 받은 주식 540만 주를 가지고 있었다. 8조원이 넘는 잡스의 재산은 아내인 로렌 파월과 네 명의 자녀에게 우선 배분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잡스의 유언장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향방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는 애플에서 쫓겨난 지 11년 만인 1997년 애플로 돌아온 뒤 지난 8월 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는 매년 1달러씩 14년간 총 14달러의 연봉만 받았다. 실리콘밸리의 다른 CEO들이 탐욕스럽게 챙기던 스톡옵션(기업이 임직원에게 일정 수량의 자기 회사 주식을 일정한 가격으로 매수할 수 있도록 권리를 주는 것)도 받지 않았다. 잡스는 애플로 돌아온 뒤 보유하고 있던 540만 주의 애플 주식 중 단 한 주도 매각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애플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닌 자신의 일부였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는 1달러의 연봉만으로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을까? 잡스가 가지고 있던 1억3천8백만 주의 디즈니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이 1년에 약 4천8백만 달러, 우리 돈으로 5백80억원에 해당했다. 대부분의 CEO들이 회사에서 지원받는 비용 외에는 애플에 금전적인 보상을 거의 요구하지 않은 채 보유한 주식의 배당금으로 생활해온 것이다. 그가 6개월 동안 병가를 떠나 있던 2008년 애플이 잡스에게 쓴 비용은 그의 병원비를 비롯해 80만 달러 정도다. 애플은 1999년 잡스에게 보너스로 제트기 한 대를 선물했다.

Personality
“‘단추를 세 번만 눌러서 원하는 곡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메뉴가 눈에 금방 들어오지 않아요’
‘손에 잡히는 느낌이 불편해요’
잡스가 일일이 지적한 사항은 거론하자면 끝도 없을 정도예요” (아이팟 개발 당시 스티브 잡스를 회상하며)


스티브 잡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세운 기준대로만 움직이는 독선가였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실용가였다. 젊은 시절 스티븐 워즈니악과의 공동 작업으로 얻은 수익을 가로채고 이를 안 워즈니악이 분노하자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없었던 일이야”라며 부정하는 식이었다. 회사가 성공해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나눠줄 때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만 골라 줬다.

회사 성공에 기여한 이들을 가르는 자의적인 기준을 내세웠는데 제외된 사람 중에는 오랜 친구이자 창업 멤버인 페르난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다 못한 워즈니악이 자신의 주식 8만 주를 제외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줄 정도였다(스티브 잡스는 이를 두고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도태되는 사람을 끌어안고 가기보다는 가차 없이 버리는 타입이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 자신을 잘 따를 사람만을 중용하는 잡스와 함께 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극히 세부적인 것까지 완벽과 최선을 고집하며 직원들을 몰아붙이는 독재자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철권통치는 그가 애플에 떠났다 다시 돌아온 1997년 극에 달했는데 당시 애플 직원들 사이에서는 ‘엘리베이터에서 잡스와 마주치지 말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잡스는 엘리베이터에서 직원을 만나면 “지금 하는 일이 뭐죠?”라고 묻는데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잘 못하거나 신통치 않은 대답이 나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곧바로 해고 통보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동안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직원들이 많았다고 하니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애플 복귀 후 사내 기부 프로그램을 폐지시키는 등 가지고 있던 막대한 재산에 비해 기부에 인색했던 일,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사소한 것을 ‘트집’ 잡아 전 세계 기업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소송을 제기해온 일(애플은 삼성 갤럭시탭에 특허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두 기업 사이의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등을 들어 ‘잡스는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잡스가 끊임없는 혁신 제품으로 인간과 기술의 소통 방식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기술 산업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이런 괴짜 같은 인간성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Remains
“죽음은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곧 죽게 된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된다. 거의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2005년)


“스티브의 성공에 대한 가장 큰 찬사는 전 세계가 그가 발명한 장치들로 그의 죽음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라는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10월 6일, 전 세계 사람들은 아이폰 혹은 아이패드를 통해 스티브 잡스의 부고를 접했다. 누군가는 조깅을, 누군가는 점심식사를, 누군가는 침대에 누워서였다. 애플Ⅱ의 개발로 개인용 PC시대를 열었고 매킨토시와 속이 비치는 컴퓨터 아이맥으로 혁신을 거듭했다. 아이튠즈와 아이팟을 통해 IT를 감성적 영역으로 끌어왔으며 태블릿 PC인 아이패드를 내놓음으로써 포스트 PC시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능을 하나로 합친 아이폰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다’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킴과 동시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지구상의 모든 정보에 접속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검은색 터틀넥에 청바지, 회색빛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봉투 속에서 맥북에어를 꺼내던 그의 모습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짜릿했던 순간 중 하나로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실용주의적 몽상가 스티브 잡스로부터 시작된,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의 무언가를 통해서 말이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참고 서적 /「스티브 잡스를 꿈꿔 봐」(임원기 저, 토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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