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들

독도, 대마도, 이어도 우리땅인 이유 사전에서 찾아보자

주인장 생각 :

독도는 당연히 우리땅이고 대마도는 지금 일본이 지배하고있지만 지리적으로만봐도 우리땅이다.

이어도는 암초라하여 따로 애기가 없지만 중국이 이곳을 가지려고 침을 흘리고있다.

독도랑 대마도는 우리땅이기에 우리가 지배해야하는게 맞는데

대마도는 일본의 욕심으로 다시 뺏어간 땅이되어버렸다.

중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둘러싸고있어 자원을 차지하려고 우리를 괴롭힌다.

자원이 제대로 된게 하나도없고 인적자원만 많은 한국에서

그나마 가지고있는걸 뺏으려하는 두나라...

냉정하게 판단하여 필요없는걸 주면서 우리가 절실히 필요한걸 가져올수있으면좋겠다.

외교적 나라적으로 국력을 키워 아무말못하게 할수있는 그날이 언릉 왔으면 좋겠다.

(통일도되서 북한 자원도 인적자원더 더 많아짐 좋겠는데... 독재가 언제 막을 내리려나...)


1. 독도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3459&mobile&categoryId=200000993


독섬이라고도 하며, 면적은 18만 7,554㎡이다.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89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 37도 14분 26.8초에, 서도는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에 위치한다. 동도·서도간 거리는 151m로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6m, 면적 73,297㎡이고, 서도는 해발고도 168.5m, 면적 88,740㎡이다.

삼국사기에는 512년(신라 지증왕 13) 하술라주의 군주 이사부가 울릉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왕국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독도가 우산도(于山島)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우산과 무릉 두섬은 날씨가 맑은 날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71년 삼봉도(三峰島)와 1794년 가지도(可支島)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울릉도를 울도군이라 칭하고 울릉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하도록 정하였는데, 석도는 '돌로 된 섬'이라는 뜻의 '돌섬'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전라도 방언에서는 '돌'을 '독'이라 하여 전라도 남해안 출신의 울릉도 초기 이주민들은 '돌섬'을 '독섬'이라 불렀으며,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獨島)'가 되었다고 한다. 독도가 행정지명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이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서로 알려져 있다.

한편, 프랑스와 유럽 같은 나라에서는 독도를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Liancourt)', '호네스트(Hornest)'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1905년에 일본은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바꾸고 시마네현[島 根縣]에 편입한 뒤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한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2005년 3월 16일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竹島の日]'로 정하는 조례안 가결했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는 같은해 3월 17일 일반인에게 독도 방문을 전면 허용하고 대일(對日) 신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출처] 독도 | 두산백과


2. 대마도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7199&mobile&categoryId=1902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속한 695㎢ 규모의 열도. 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대한해협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부산에서 50km 정도, 일본 규슈(九州) 본토와는 132km 떨어져 있다. 일본에서는 쓰시마섬이라고 한다.

상도(上島), 하도(下島)의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산에서 대마도를 볼 때 두 마리의 말이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지명이 대마(對馬)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창조 신들이 쓰시마를 일본 최초의 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마도는 역사상 한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하여야 하므로 고려 말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朝貢)의 형식을 취하여 그 대가로 미곡(米穀)을 받아갔으며, 조정에서도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우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후 이곳을 근거지로 왜구가 자주 출몰하자 조선 세종 때 이종무가 원정(遠征)을 하기도 했다.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이 열도는 다이묘(大名) 소씨(宗氏)의 봉토였다. 1274, 1281년에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주민들이 대량학살당했다. 러시아는 1861년에 이 지역의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으며,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1488년 당시 명나라 사신이었던 동월(董越)이 영종의 명을 받아 조선 땅을 둘러본 뒤 작성한 견문록 ‘조선부(朝鮮賦)’에 나와 있는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라는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다.


3. 이어도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6220&mobile&categoryId=200000993


파랑도(波浪島)라고도 한다.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馬羅里)에서 남서쪽으로 149㎞ 떨어진 동중국해(東中國海)에 있다. 중국의 서산다오[余山島]에서 287㎞,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도리시마[鳥島]에서 276㎞ 떨어진 해상에 위치한다.


[이어도의 위치]

수중 암초(暗礁)로 해저광구 제4광구에 있는 우리나라 대륙붕의 일부이다. 암초의 정상이 바다 표면에서 4.6m 아래에 잠겨 있어 파도가 심할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옛날부터 제주도에서는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나 남편이 살고 있다는 전설 속 환성의 섬 또는 피안의 섬으로 일컬어져 왔다. 정상부를 기준으로 동쪽과 남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서쪽과 북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면적은 50m 등수심선을 기준으로 약 2㎢(동서 약 1.4㎞, 남북 약 1.8㎞)이다.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Socotra)호가 처음 발견하였으며, 선박의 이름을 따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라고 불리었다. 1910년 영국 해군에 의해 수심 5.4m의 암초로 측량된 바 있고, 이후 1938년 일본이 인공구조물 설치를 계획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으로 무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1년 국토규명사업의 일환으로 이어도 탐사를 시작하여 암초를 확인한 뒤, '대한민국 영토 이어도'라고 쓰인 동판 표지를 바다 속에 가라앉히고 돌아왔다. 1987년에는 해운항만청에서 이어도 등부표를 설치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공표하였으며, 이는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이다.   인근 수역은 조기·민어·갈치 등의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며, 중국·동남아시아 및 유럽으로 항해하는 주항로가 인근을 통과하는 등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해역이다. 해양수산부는 해양연구·기상관측·어업활동 등을 위한 이어도 과학기지 설치를 위해 1995년부터 해저지형 파악과 조류관측 등 현장조사를 실시해왔으며 2003년 6월 이어도 정봉에서 남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동경 125도 10분 56.81초, 북위 32도 07분 22.63초)를 설치하였다. 2001년 6월 30일 정식으로 발효된 한·중어업협정에서 섬 유역이 한국과 중국 어선이 공동으로 조업하는 한·중 중립지대로 설정되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출처] 이어도 | 두산백과